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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지순례기] 2024년 4월 제33호-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⑩ 만레사동굴
작성자 : 천주교서울국제선교회(sicms1004@gmail.com) 작성일 : 2024-04-25 조회수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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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⑩ 



만레사동굴 


글. 사진. 김원창 미카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한 길입니다. 성인들의 이런 필사적인 노력이 담긴 장소는 대부분 아름답고 거대한 성당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작은 경당이나 거친 동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화려한 성당에서보다 초라해 보이고 때론 평범해 보이는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이 훨씬 큰 이유도 그런 곳에는 회심을 통한 삶의 전환을 가져왔던 강렬함이 살아있기 때문일 테고요. 오늘은 아주 작고 초라하지만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예수회의 창설자 성 로욜라의 은수 동굴 ‘만레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14세기부터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또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전 유럽을 휩쓸면서 신(神) 중심의 세계관이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스페인(Espana)은 비교적 종교적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체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럽 본토와 이베리아 반도를 가르며 좌우로 길게 펼쳐진 피레네 산맥 때문입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높은 산맥은 큰 장벽일 수밖에 없었겠죠. 두번째 이유는 이베리아 반도가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운 이슬람 왕조에 의해 711년 무력으로 정복당한 후 무려 781년간이나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의 정복 이후 거의 80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 ‘재정복’이라는 뜻으로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800년에 걸쳐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이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하는 단어)을 통해 겨우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럽 본토보다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 정신을 중심으로 나라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나라를 되찾는 데 노력을 기울였던 이베리아 반도 특히 스페인에는 많은 성인이 탄생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7부제 가운데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Laurentius, 225~258), 세비야의 주교였던 성 이시도로(Isidorus Hispalensis, 560~636), 농부들의 주보 성인인 성 이시도로(Isidorus, 1070~1130) 등이 대표적 성인들입니다. 그리고 국토회복운동이 지난 15~16세기에 등장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천주의 성 요한을 비롯해 예수회를 창설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 훌륭한 삶을 사셨던 분들입니다. 특히 로욜라 출신의 성 이냐시오는 회심을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교회와 세상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분입니다.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바스크 지방의 귀족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전쟁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관행대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고요. 귀족 출신에 명예로운 기사를 꿈꾸며 살아갔던 그에게 남은 것은 평생

다리를 절고 다녀야 하는 비참한 신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년에 걸친 병상 생활은 그에게 뜻밖의 전환점을 주었습니다. 무료한 병상 생활을 물리치기 위해 접했던 성인전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이 이냐시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병상에서 첫 번째 회심을 한 그는 바르셀로나 근처 몬세라트 수도원을 향해 순례를 떠났고,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세속적 꿈과 목표를 내려놓았다는 표징으로 몬세라트에 모셔진 검은 성모상 앞에 자신의 칼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거지에게 기사의 상징인 망토를 내어주고 감자포대로 만든 넝마를 걸칩니다. 이제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향해 모든 것을 바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몬세라트를 순례한 성인은 수도원에서 15km 정도 떨어진 동굴에서 1년 정도 머물며 영적 수련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만레사 동굴로 불리는 이곳에서 11개월 정도 머문 시간은 이후 이냐시오의 영성에 매우 깊고 큰 영향을 미칩니다. 몬세라트를 순례하고 만레사에서 머물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책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새로운 신심 운동으로 유명한 두 가지의 책이 그에게 깊은 성찰을 주었는데, 몬세라트의 유명한 개혁 수도원장이었던 가르시아 데 시스네로스(Garcia de Cisneros, 1455~1510)의 「영적 삶의 수련서」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나라에서 「준주성범」으로 널리 알려진 책입다. 이 두 가지 책을 통해 영적이고 내적인 삶에 관해 결정적 도움을 받은 그는 어떤 것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식별하는 “식별의 원리”를 찾아내기 시작했고,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나라 신학생들이 사제품을 받기 전에 40일간 대침묵 피정을 해야 하는데 이 기간에 이냐시오 성인께서 행하시고 남기신 영신수련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이 영신수련의 방법이 특별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특징은 “신심, 갈망 그리고 식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레사 동굴은 까르도네르 강이 흐르는 마을 밖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절벽 끝에 매달리듯 붙어 있던 동굴은 이제 예수회 영성센터가 들어서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동굴을 감싸고 있는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최근에 그려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예수회를 창설하신 일곱 분의 성인상도 순례자를 내려다보고 있고요. 성당을 지나면 아주 작은 박물관을 만나게 되는데, 성인께서 만레사에서 은수생활을 하실 때 쓰시던 탁발그릇도 보실 수 있습니다. 성인께서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드셨다는 초라한 탁발그릇마저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박물관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입구는 화려한 장식으로 되어 있지만, 벽면 만은 500년 전 그 모습대로 보존한 작은 동굴을 만나게 됩니다. 20명 정도가 겨우 쪼그려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곳입니다. 이 동굴은 순례자들에게 놀람만큼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요. 이는 그곳이 500여 년 동안 기도가 지속된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수도자와 평신도로 이루어진 기도 단체는 지금도 이 동굴 안에서 교대로 끊임없이 기도로 그 동굴을 채워갑니다. 순례자들이 들이닥치면 슬며시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주는 그들과 인사할 때면, 그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선하고 맑은 눈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좁고 거칠지만 거룩한 만레사 동굴 한쪽에 자리를 잡고 500년 전 성인의 삶을 묵상하며 나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찾고 발견하려는 내 노력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나의 약함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겸손을 무기 삼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적이 있는지?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 수 있도록 갈망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이곳에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고, 동굴 앞에 흐르는 까르도네르 강가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후일 성인은 “내 평생 기도하고 공부해서 얻게 된 모든 것보다, 그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훨씬 많다.”고 하셨던 그런 체험이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흔적이 남은 만레사뿐 아니라 어디서든 순례자 모두가 아니 그리스도인 모두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고 하느님께서 각자를 통해 드러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르셀로나 지역이나 스페인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성지인 이곳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다녀가셨습니다. 로욜라에서 만레사까지 이어지는 <이냐시오의 순례길>을 따라 순례하시는 도중에 이곳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사실 까미노로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만큼이나 <이냐시오의 순례길>도 우리 교회에 남겨진 중요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전쟁에서 상처를 입어 1년간 병상에서 치료를 하며 지내다가 ‘회심’의 사건을 경험한 이냐시오 성인께서 고향을 떠나 몬세라트까지 순례했던 길을 따라 걷는 여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바르셀로나 지역을 방문하시게 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도 걸으시고 구엘 공원이나 성가정 성당을 꼭 방문하시게 될 거에요. 황영조 선수를 기억하며 몬주익 언덕에 있는 올림픽 경기장도 계획에 넣으실 수 있고요.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비록 여행을 계획하셨더라도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만레사 동굴만큼은 꼭 시간을 내어 순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휘황찬란한 금빛 성당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외떨어진 동굴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잠시 기억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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