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⑮
Saintes-Maries-de-la-Mer(바다의 성녀 마리아)
김원창 미카엘
1886년, 한 무명화가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예술의 도시 파리에 발을 들입니다.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의 주인공인 그였지만, 살아 있던 시절 그를 믿어준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명 동생 테오뿐이었습니다. 정신질환과 경제적 궁핍으로 점철된 격정적 인생을 살아온 그는 살아생전 끝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1890년 7월 27일, 한 밀밭에서 스스로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습니다. 누구나 그 이름을 한 번 쯤 들어본 이 초라하고도 위대한 화가는 바로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Vincet van Gogh)’입니다.
굵고 진한 붓터치로 칠해진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고흐의 유화는, 이제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한 카페 테이블마저 관광소가 될 정도의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흐 덕분에 사랑받는 관광명소가 된 장소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한 항구도시 ‘생트 마리 드 라 메르(Sainte Maries de la mer)’입니다.

1888년 여름, 요양차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하던 고흐는 당시 주민 800명가량의 작은 어촌이던 이곳에 도착해 총 여섯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고흐의 미술인생 끝자락에 해당하는 ‘아를(Arles)’ 시기에 남긴 이 풍경화들은 작고 평화로운 어촌을 가득 채운 빛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마을을 찾는 순례자의 목적이 오직 고흐의 그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습지나 그곳을 거니는 홍학 때문도, ‘카마르그(Camargue)’의 백마 때문도 아닙니다. 이 작은 프로방스 시골 마을에는 복음서가 쓰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도 시대의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흔히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Romani)’ 민족의 애환 어린 역사와 맞물려 전해져 내려옵니다.
‘생트 마리 드 라 메르(Saintes maries de lamer)’는 프랑스어로 ‘바다의 성녀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마리’는 단수(Marie)가 아니라 복수(Maries)입니다.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바다의 성녀 마리아들’이 되는 셈인데, 이는 여기서 말하는 마리아가 우리가 아는 성모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를 지켰던 ‘마리아 살로메와 또 다른 마리아’를 뜻합니다(마태 27,56; 요한 19,25; 마르 15,40; 16,1). 마리아 살로메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큰 야고보와 요한 복음사가의 어머니이고, 또 다른 마리아는 클로파의 아내이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마르 15,40)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선 마리아 살로메가 빠지는 등 복음서마다 골고타를 끝까지 지킨 이들의 면면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네 복음서를 교차해 보았을 때 이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친척으로서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승천 이후, 이스라엘 전역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시기에 마리아 살로메와 또 다른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타, 나자로, 그리고 예수님의 일흔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막시미노 등 예수님을 따르던 일행이 로마 병사들에 의해 조각배 하나에 실려 지중해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방이 대륙에 닿아 있는 지중해라 할지라도, 돛도 노도 없이 바다로 떠밀리는 것은 굶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 모진 형벌에서조차 드러났습니다. 기적처럼 이들이 오직 파도에만 이끌려 지중해 반대편의 해변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모두 예상하셨다시피 그곳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입니다. 이들은 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근처 프로방스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마르세유 지방으로는 나자로가, 엑상 프로방스로는 막시미노가, 따라스콩으로는 마르타가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두 마리아는 마을에 남아 하녀인 사라와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도 마을 중앙의 ‘노트르담 드 라 메르(Notre dame de la mer)’ 성당에는 두 성녀 마리아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하녀 사라의 유해도 지하 크립타에 모셔져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며 30년 동안 홀로 은수생활을 하다 막시미노에게 성체를 받아 모신 후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이 전승 속 인물 중 한 명인 사라는 수수께끼에 쌓인 비밀스러운 사람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은 사라는 오직 이 마을의 전승 속에서만 등장하며, 그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촌에선 마을 이름에조차 새겨진 두 성녀 마리아보다 오히려 성녀 사라가 더 큰 영향력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살로메의 하녀로 알려진 사라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집트 또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짙은 피부를 지녔던 그녀는 ‘사라 라 누아르(Sara lanoire)’, 곧 ‘검은 사라’라 불립니다.

평생 누군가를 섬기는 하녀로 살았던 그녀는 몹시 겸손하고 신실했다고 전해집니다. 언제나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던 그녀는 스스로를 ‘주님의 하녀’라 여기며 이웃에게 헌신하며 살았다고 전해지며, 한 전승에 따르면 표류 끝에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겉옷을 물 위에 펼쳐 일행을 해변까지 이끌었다고 합니다. 여생을 ‘생트 마리 드라 메르’에서 보내고 선종했다는 그녀를 오늘날까지 이 마을을 포함한 전 세계의 로마니 공동체는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5월 말이 되면 사라를 기억하며 성대한 축제를 엽니다. 바다 너머에서 찾아온 사라를 기억하기 위해 축제 때가 되면 사라의 성상은 성당에서 나와 해변에 안치됩니다. 성상을 바닷물에 넣었다 꺼내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는 의식은, 교회의 전례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돈 로마니 민족을 위로하기 위한 민중 신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라는 역사적으로 주변인과 이방인, 종속된 이들의 성인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로마니족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어 ‘생트 마리 드 라 메르’는 로마니 공동체의 영적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흔히 집시라고 불리는(이집트와 어원을 같이하는 이 호칭은 유럽인들이 로마니족을 외부인으로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로마니족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소수민족으로, 유럽 전역에 약 1000만 명에서 12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언어학과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로마니족의 기원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와 라자스탄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출발하여 서아시아와 북이집트, 그리스를 거쳐 11~12세기경 발칸 지역에 정착한 로마니족은 유럽인들에 의해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동쪽 나라, 즉 이집트에서 왔다는 뜻으로 ‘집시’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로마니족은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 15세기경에는 유럽의 끝이라 할 만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까지 퍼졌습니다.
이런 왕성한 확장은 유목민족의 전통과 함께 기존 유럽 사회와의 끝없는 마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럽인과 섞이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혈통과 전통을 가진 로마니 민족은 유럽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적합하지 않은’ 존재로 머물러 있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외부인이었고, 어디에 가든 의심과 차별이 섞인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으며 때로는 아무런 근거 없이 이단의 근원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외모와 언어, 전통의 차이를 이유 삼은 유형무형의 차별은 결국 가톨릭 교회에 의한 조직적박해로 이어졌습니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많은 지역에서 로마니 민족은 노예로 전락했고, 독일이나 폴란드, 이탈리아 등의 지역에선 아예 민족 전체를 추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로마니 민족이 끝없이 유럽 대륙을 떠돌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차별은 현대까지 이어져, 1930년 나치 독일은 로마니 민족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며 수십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수백만 명의 로마니인이 전기나 수도조차 제공되지 않은 빈민가에 거주하며 폭행을 비롯한 범죄의 대상이 되고는 하며, 경찰조차 이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런 차별은 로마니 공동체를 더욱 소외시키며 주거와 안전의 위험을 강화하고, 아이들은 학교나 병원에조차 가지 못합니다. 행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합니다. 끝없는 범죄와 빈곤의 악순환이 고리처럼 이들을 감싼 채 포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로마니 민족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족과 친지뿐입니다. 주거와 자원, 노동과 식사를 공유하는 대가족 중심의 문화는 그들을 둘러싼 높디높은 차별의 벽으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노인에 대한 공경은 로마니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들의 가진 삶의 경험과 지혜는 로마니 민족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입니다. 로마니 아이들은 독립적이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도록 키워지며, 그들을 둘러싼 편견에 꺾이지 않도록 스스로의 뿌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가족과 친지, 공동체에 대한 강력한 연대는 단순한 문화적 특성이 아니라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인 셈입니다. 로마니 민족이 공유하는 언어는 서로를 식별하고 로마니족만의 문화를 후세대에 전해 민족을 연결하기 위한 사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니 언어로 전해지는 노래와 이야기, 속담은 세대를 넘어 도덕적 교훈과 역사, 그리고 민족의 경험을 전달합니다. 글로 남겨진 기록이 없는 그들이 역사를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구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니 민족에겐 언어조차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를 지키기 위한 방패인 것입니다.
이런 로마니 민족의 수호성인이 바로 성 사라입니다. 그리고 ‘생트 마리 드 라 메르’는 로마니족의 중요한 순례지이기도 합니다. 비록 공식적인 성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사라이지만, 적어도 로마니 민족에게만큼은 그 어떤 성인보다 중요한 존재입니다. 사라는 로마니족의 희망과 단결의 상징이며, 삶의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보호자입니다. 사실 기원을 따라가면 사라는 그 이름부터 로마니 민족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라는 이름이 로마니의 민족적 기원인 인도 북부에서 널리 숭배되는 여신 가운데 하나인 ‘칼리(Kali)’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성녀 사라가 어째서 로마니 문화에 그토록 깊이 뿌리내렸는지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성 사라는 로마니 민족의 종교적 연결고리일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투쟁과 열망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매년 5월 24일이 되면 전 세계를 떠돌던 로마니인들이 한데 모여 고유의 음악과 춤, 그리고 기도로 작은 항구 마을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고는 지하에 모셔진 사라의 성상을 성당 밖으로 모셔와 바다에 담궜다 꺼내고는 다시 성당 지하로 모셔갑니다. 바다를 넘어 프랑스 해변에 닿아, 하녀라는 미천한 신분에도 겸손과 품위를 잃지 않으며 모두를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살았다는 한 성녀의 일대기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럽 전역을 떠돌며 갖은 박해를 받았음에도 역사와 혈통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은 로마니 민족의 여정과 묘한 공명을 일으킵니다.

높디높은 차별의 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문화와 공동체를 지키며 살아온 그들의 축제에 함께하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입니다. 물론 그러러면 일 년 가운데 단 이틀, 5월 24일과 25일에 ‘생트 마리 드 라 메르’를 찾아야 한다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십 수 세기 동안 이방인이자 외부인으로서 대륙을 떠돌고 언제나 문제적 집단으로 손가락질당하며 소외받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을 지키고 있는 이 긍지 높은 민족의 축제가 교회의 전승 안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아주 특별한 체험으로 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례와 축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특별한 이틀 간의 시간에 한 번쯤 참여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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